또 한번 시작했다. 집에 소장하고 있는 슬램덩크 시리즈를 꺼내들었다. 1편은 "농구 좋아하세요?", "물론이죠"라는 대화로 얼추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두번째 편 세번째 편... 며칠간 쭉 읽어나간다. 그러다보면 위에 대한 답은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로 바뀐 채 마무리 편에 실려있다.
내게 슬램덩크 정주행의 쿨타임은 1년 안팎이다. 정주행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계절이 몇번 바뀌고 나이가 한두살 더 먹다보면 다시금 슬램덩크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다시 그 뜨거운 희노애락을 느끼고 싶어 꺼낸다.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슬램덩크가 내게 별난 이유다.
21살에 처음 읽은 이 만화책 시리즈를 어느덧 서너 차례는 읽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전 회독엔 보이지 않았거나 놓쳤던 디테일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디테일은 북산의 강백호가 파울을 몇번 범했다든지, 산왕전에서 정대만이 9개중 8개의 3점을 집어넣었다든지, 이런 경기 안 요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이런 세세한 부분은 정주행이 끝나면 다시 백지상태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심지어 능남전, 산왕전 등 경기에서 누가 이기는지 순간 헷갈릴 정도였으니 그런 '경기 내용'은 점차 중요성이 옅어지는 것 같다.
그런 것보다도, 개별 사건에 대한 전후 맥락을 더 이해하게 됐다랄까. 강백호의 뱅크슛은 성공률이 몇이나 됐는지, 같은 단편적 사실보다 그 앞뒤 맥락이 보이는 것이다. 남들에겐 쉽디 쉬운, 뱅크슛 하나를 성공하고자 강백호는 안 선생님과 2만개의 슛을 던지지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가 결국 해낸 일련의 과정들이 더욱 더 부각되어 보였다. 또, 서태웅과 정우성이 품고 있는 미국 진출에 대한 야망이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내게도 비슷한 고민으로 다가왔다.
채치수가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사는 '전국제패'도 마찬가지였다.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라면, 결국 전국 유수의 강호와의 경기에서 상대보다 더 많이 득점하고 더 적게 실점해야했다. 그런 와중에도 늘 정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전국 제패를 향해 올라갈 수 없다. 북산이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함께 허덕이고또 환호하는 등산객의 시점에서 이전까지 이 책을 읽어내려갔다고 한다면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이젠 북산이라는 등산객을 저만치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북산 말고도 여러 고교의 대표가 있는 등산객 무리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이 정상을 향해 아등바등 땀흘리고 올라가는 과정은 단순히 농구 에서 이기고 지는 그런 것을 넘었다. 내게 슬램덩크가 처음엔 '농구 만화'였지만, 이젠 '농구를 매개로 한 사람 만화, 인생 만화'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초점 맞추고 싶은 인물이 계속 생겨난다는 것. 이전엔 그저 강백호의 호기로움, 정대만의 끈기 같은 것에만 눈길이 갔다. 내가 욕심이 많아진 건지 모르겠지만, 이젠 그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작품속 비중의 차이는 있더라도 사연 없는 사람은 없고 본인의 이야기 없는 선수는 없을테다. 게다가 팀스포츠는 더욱 그럴테지. 화려한 에이스가 있으면 다른 누군가는 묵묵히 빈틈을 메꾸는 역할을 해야한다. 그러니 채치수의 리더십, 정우성의 야망, 황태산의 솔직함...이런 개성이 제각각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선수들 뿐만 아니라, 감독이나 관계자에게 풍겨나오는 각자의 매력에 하나둘 빠지게 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는 제목의 영화가 작년 초에 히트했다. 슬램덩크 원작 속 산왕전을 메인으로 한 작품이다. 난 산왕전 승부를 '책 - 영화 - 책' 이런 순서로 본 셈이다. 맨처음 책을 읽고 그 텍스트와 그림만으로도 감동와 흥분을 느꼈다. 희열이 엄청났다. 그리고 영화를 봤다. 작품의 디테일은 사운드와 모션으로 더욱 생생히 다가왔다. 정대만의 헐떡이는 3점슛, 강백호의 호방한 태도는 살아움직였다.
이번에 다시 책으로 읽었다. 분명 고정된 채로 프린트된 대사와 묘사였다. 그런데 거기서 소리가 들리고 움직임이 느껴지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어찌됐든 독자들에게 책은 멈춰있는 존재일 뿐인데, 산왕전 막판은 내게도 시간이 조여오는 압박감을 느꼈고, 내가 풀코트 프레스를 당하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서태웅의 패스를 받는 강백호가, 갖은 노력이 결집된 슛을 성공했을 때의 클라이막스는 정말.
이 감동을 한번더 다른 차원으로 전환하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이번 여름에 가기로 돼있던 일본여행에서 가마쿠라를 코스에 추가했다. 바닷가와 능남고교가 있는 가마쿠라코코엔 역까지 가는 에노덴 전차에 내가 몸을 싣게 된 것이다.
SLAM DUNK
- 하루에 2-3권 읽는게 최대... 1-2년마다 꼭 한번은 읽는다. 쿨타임.
- 읽을 수록 간과했던 디테일이 더 보인다. 보이지 않던 주인공의 심리가 점차 보인다.
- 내가 갖고 있는 20권짜리 시리즈(버전)안에 16강에서 벌써 19권짜리...
- 책 영화 책으로 번갈아 읽으니...
- 강백호, 정대만, 채치수가 겪은 저마다의 시련이 우리 삶에 투영된다. (아마 서태웅은 빼야겠지. 근데 그 잘난 정우성도 패배를 맛봤으니.)
- 슬램덩크 디테일보단 인물간의 굵직한 스토리. 처음엔
- 슬램덩크가 주는 뜨거운 희노애락이 그리웠다. 1년마다 쿨타임이 돈다.
- 슛 하나를 위해 들인 강백호의 노력.. 같은 맥락이 선명하게 기억될뿐이지, '몇점차 승리' 같은 디테일은 회독을 거듭해도 까먹기 마련
- 강백호, 정대만, 채치수 등이 겪은 저마다의 시련이 우리 삶에 투영되는 기분. 그 잘난 정우성도 북산에게 좌절을 맛봤으니.
- 책-영화-책 순으로 접했다. 책에서 느낀 감동이 영상 속 사운드와 모션으로 다가왔다. 다시 만화책을 읽자 텍스트에서 소리가 들리고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한 진귀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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